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(문단 편집) === 9월 총파업, 대구 10.1 사건 === 조선공산당으로서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이후 미군정의 탄압과 대중의 지지기반 상실이라는 악재를 동시에 겪게 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해방 후 견지해 오던 대미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신전술이라고 하는 강경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. [[http://www.tongilnews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201982&page=2&total=225|출처: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]] 정판사 사건의 공판 기일을 너무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론 준비 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분노한 조선공산당은 '신전술'을 채택하였고 이에 따라 [[전평]]의 철도노동자들이 주도하여 [[9월 총파업]]을 일으켰다. 노동자들의 총파업선언서의 첫 항목에는 ‘쌀을 달라. 노동, 사무원,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’는 요구가 들어갔다. 물가등귀에 따른 임금인상, 공장폐쇄와 해고 절대 반대, 반동테러 배격,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 즉각 석방 등도 요구했다. [[이관술]]을 석방하라는 것이었다. 이관술은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1주 40시간 노동제 주장하던 노동운동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노조가 부당하게 구속된 노조 지도자 석방 요구하며 파업하는 풍경이라고 보면 된다.[[http://m.usjournal.kr/news/newsview.php?ncode=1065602176790038|#]] 이 파업을 경찰, 반공단체가 과격하게 진압하는 도중 사상자가 나오자 대구 시민이 분노하여 [[대구 10.1 사건]]이 일어났다.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에 따르면 대구 10.1 사건 이전에도 좌익에 대한 테러에 시민들이 분노하곤 했다고 한다. >사람들이 한 아가씨가 좌익 시위에 참여하라는 호소문을 벽에 붙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두들겨 팼다. 몇몇 여자들이 미국 경찰에게 달려가 이 구타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. 우리는 "이것은 조선인들의 내부 문제다. 우리와 상관없다."라는 익히 알고 있는 대답을 들었다. 그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깡패들의 손아귀에서 피범벅이 된 여학생을 구해내었다. "바로 이렇게 일본 압제자들이 우리를 구타했다.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두들겨 팼었다.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." 나이든 농촌 아낙네가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. 바로 그러한 광경이 1946년 서울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. >---- >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, 1945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다른 [[좌파]] 정당과 합당하여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. 조선공산당 대회파(=반박헌영파)는 [[사회노동당]], 간부파(=박헌영파)는 [[남조선로동당]]을 만들었다. 김철수는 사회노동당으로 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